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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커피와 담배

by 미뉴르 2021. 12. 14.
[커피와 담배]
저자 : 정은
출판 : 시간의 흐름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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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서점을 좋아한다.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책 제목을 쭉 훑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나오는 행위를 좋아한다. '이거 읽어야지!'라는 그 계획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대출이라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출만 해놓고 읽지 않다가 연장까지 하고 반납 기일이 되어 그대로 반납해버리는 책이 많다. 그러기를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빌려서 읽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사실 이 직전에 빌린 책도 대강 앞부분을 읽고 중간에 잠깐 읽고 결말을 읽었었는데 책 읽는 내내 눈물바다여서 제대로 읽지 못했고, 반납 날짜가 되어 리뷰를 쓰지 못하고 반납해버렸다.

 이번만큼은 꼭 리뷰를 쓰겠다는 마음으로 읽고 반납하기 전에 쓰는 글이다. 책을 잘 안 읽게 되는 만큼 요즘은 페이지 수가 적고 글자가 큰 책을 읽는다. 그래서 131페이지짜리의 얇은 이 책이 간택되었다.

 

 페이지 수와 글씨 크기, 그리고 첫 장의 문체만 확인 후 바로 빌려버린 이 책은 사실 다른 책들과 재미있는 연관성을 가진다. 『커피와 담배』, 『담배와 영화』, 『영화와 시』, 『시와 산책』, 『산책과 연애』, 『연애와 술』, 『술과 농담』, 『농담과 그림자』, 『그림자와 새벽』, 『새벽과 음악』 바로 이 10권의 책은 제목 끝말잇기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작가는 모두 다 다르다. 그리고 나는 이 끝말잇기의 시작인 『커피와 담배』를 고른 것이다. 이 뒤의 9권을 읽을 거냐고? 글쎄, 적어도 바로 다음에 대출하는 책이 저 9권은 아닐 것 같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책이 있고 나는 여기에 매몰되어 수개월을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대한민국 사람치고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편이며 담배는 입에도 대본 적 없는 비흡연자다. 심지어 담배 연기를 매우 싫어한다. 오늘 검색해보니 우리나라 국민들의 연간 평균 커피 소비량이 340~360잔 사이였다. 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지 않는데 다시 찾아보긴 귀찮다. 아무튼 대부분의 국민들이 하루 한 잔 이상의 커피를 소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많이 쳐줘야 1년에 30잔이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책을 골랐는가. 그냥 눈에 띄었다. 얇고 글씨 크고, 그리고 커피를 마시진 않지만 커피나 카페에 대해서는 뭔가 낭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중학생 때부터 만들어 쓰는 책갈피가 『Cafe, 한 사람을 기다리다』를 읽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

 

 이 책에는 왜 커피를 좋아하는지, 담배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커피와 담배가 어떤 의미인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커피와 담배를 멀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접어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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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굳이 마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마시는 것뿐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엄마가 커피를 잘 못마시게 했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공부할 때 종종 마셨는데 커피를 마시면서 졸고 있는 나를 보고는 커피가 나에게 무쓸모인 음료임을 느꼈다. 선후배들과 밥약(밥약속) 후에는 대부분 디저트로 커피를 먹었으므로 상당히 자주 먹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 밥약이 사라지자 커피가 필수재가 아니었던 나에게 커피는 그저 사치품이었고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가끔 먹고 싶은 커피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고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다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특정 종류의 커피들이 내 몸에 받지 않음을 깨달았다. 우유 또는 연유와 커피가 섞인 것들이 주로 그러했다. 처음에는 우유가 상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소화불량을 유발하는 커피는 더욱 좋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우유만 마실 때도 괜찮고(내 최애 음료는 우유다!), 아메리카노처럼 커피만 마실 때도 괜찮은데 둘이 섞이면 저랬다. 그런데 또 마트에서 파는 커피우유는 괜찮았다. 공부를 그만두게 되자 다시 커피는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다.

 첫 인턴을 할 때 처음에는 식사 후 커피를 마시는 인턴 동기들과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정확히는 녹차라떼를 주문했다. 몸에 받지 않는 커피를 먹고 화장실을 가는 짓을 회사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취업을 할 때까지 돈을 모으기 위해 커피를 내 돈으로 사 먹는 행위를 중단했다. 그저 동기들과 카페만 함께 갈 뿐 주문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의 마지막 인턴에서는 커피를 주려는 상사들에게 처음부터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고 말해놓았다. 못 마시는 건 아니지만 되도록 마시지 않는다고. 왜 이렇게까지 커피를 더 멀리하게 되었냐면, 그 사이에 영양제를 복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영양 흡수에 있어서 카페인과 알코올이 흡수율을 낮추었기 때문에 영양제를 먹는 날은 카페인과 알코올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카페인을 끊기 위해 좋아하던 녹차 라떼도 자제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신상품 커피나 음료가 나와서 먹고 싶으면 한 번씩 사 먹는다. 그런데 문제가 더 생겼다. 요즘은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온다. 마시는 시간을 이르게 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커피만 마시면 잠을 못 자는 타입인데 내가 나이 먹으면서 엄마의 이런 점을 닮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양질의 잠을 추구하는 요즈음에는 커피를 더 멀리 해야겠다 생각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커피시럽이 많이 들어간 티라미수를 먹어도 잠이 잘 안 온다. 최악이다. 내 최애 케익이 티라미수인데!

 아무튼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것은 돈을 모으는데 있어서는 매우 좋은 습관이다. 먹을 것에 있어서만큼은 돈을 잘 아끼지 않는데, 커피값이 줄어드니 식음료값이 40%는 다른 사람에 비해 절감된다. 그리고 나는 막입이라 스벅 커피나 믹스커피나 잘 구분하지 못한다. 믹스커피도 맛있게 먹는 입이다. 나는 이왕 돈 주고 사 먹는 거면 굳이 쓰기만 한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돈 더 주고 달달한 음료를 주문해 먹는 사람이다. 위에서 말했듯 내 최애 음료는 우유고, 주스 정도가 내가 먹는 음료다. 커피뿐만 아니라 탄산음료도 안 먹는데 탄산음료도 몸에 안 받아서 웬만해선 피한 지가 벌써 15년은 되었다.

 담배를 멀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몸에 안 좋기 때문이다. 나는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안 하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몰랐는데 크고 보니까 내가 신기할 정도로 말을 잘 듣는 사람임을 알았다. 물론 가끔 똥고집 피우는 경우는 제외하고. 그럴싸한 논리와 근거로 나를 설득할 수 있다면 매우 말을 잘 듣는다.

 결국 커피도 담배도 몸에 안 좋아서 멀리한다. 몸에서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계속하는 사람은 아니다. 건강에 크게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MSG 최소화하고 나름 풀떼기 식단, 직접 해먹이는 음식으로 엄마가 건강하게 키워왔는데 내가 스스로 몸을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같은 이유로 패스트 푸드도 잘 먹지 않는다. 

 

 책을 읽자마자 울었다. 읽던 날의 멘탈 상태가 너무 안 좋기도 했고, 책을 읽으려고 틀어놓은 음악이 슬프기도 했고, 책의 내용은 멘탈이 안 좋았던 원인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울면서 읽었다. 3개의 최종면접의 문턱에서 불합격 소식만을 받고 내년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날들 속에서, 첫 취준에 취뽀했다는 글들은 내 멘탈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상위 티어의 기업에 취업이 안 된다고 징징거리는 사람들의 글들은 눈을 낮췄음에도 취업이 안 되는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첫 시즌, 첫 최종이 끝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글들은 내년이면 취준 4년 차로 접어드는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나보다 덜 열악한 상황의 한탄은 내겐 그저 배부른 소리였고 나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원래 늘 진짜 힘든 사람은 말하지 않는 법이고 자랑이 만연한 것이 인터넷 공간이니까. 나 또한 장기 취준생들을 위한 위로글을 가장 힘들 때인 지금이 아닌, 취업 이후에 올릴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커피 주세요
담배도 주세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책장을 넘기면 목차를 보기도 전에 나오는 페이지에 적힌 말이다. 커피와 담배라는 그것의 의미보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라는 말이 더 눈에 들어왔다.

 

 

살다 보면 인생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야 할 때가 찾아온다. 무언가를 더할 여유가 있는 운 좋은 때가 있는 반면에 끝없이 빼고, 빼고, 또 빼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시기는 운과 상관없이 찾아온다. 가질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조용히 받아들여야 하는 때. 원하는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포기할 것을 골라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때.
(p. 11 中)

 책을 시작하는 첫 문단이다. 첫 문단, 첫 문장에는 글의 주제가 담겨 있다. 작가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 최근에 드라마 <키마이라>에서 드라마 속 인물이 책을 시작하는 문장을 고민하는 장면이 나왔다. 같은 의미의 말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하며 썼다 지웠다 하는 그 모습에서 첫 문장이란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작가 역시 그런 고민을 거쳐 첫 문단을 적었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포기해야하는 때. 그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20대, 30대에 찾아온다. 원하는 것에 언제든 도전할 수 있지만 그만큼 많은 실패와 포기를 마주해야 하는 때. 오히려 인생의 여유는 더 이상 도전할 것이 없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 때에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를 낮추면서 포기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 오면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이방인이라면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되는 게 더 자연스러우니까.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커피는 내게 환대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내 테이블에 커피가 놓이면 나는 잠시 동안 그 도시에 받아들여진 느낌이 들었다. 
(p. 15 中)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가 나오는 구절이다. 한국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종종 외국으로 나가곤 했다고 한다. 한국이 답답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느 곳에도 내 마음을 두고 편히 쉴 수 있는 나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가치있게 여기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기 때문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말이 또다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수많은 자리 중에 내가 원하고 나를 원하는 자리를 찾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너무 높은 자리도 너무 낮은 자리도 나의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 나는 그 중간의 어딘가를 찾아야 하는데 그 어딘가를 찾는 건 힘들다. 

 

 

 사랑은 우리가 시공간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열정에 휩싸여서 그를 사랑하고 있을 때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량이 순식간에 수십 배가 되어버린다.
 담배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의 곡선, 그가 눈을 깜박거린 타이밍, 벽에 걸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던 지지직거리는 잡음, 말보로 라이트의 맛. 그가 담뱃재를 털 때 그 재가 하강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갑자기 확장된 내 감각은 0.01초 동안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때의 1초는 혼자 있을 때의 1분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그 시간은 실제로 길었을 것이다. 직선으로 흐르던 시간이 입체적으로 흘렀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밀도를 가진 순간이 되었다. 그 밀도에 따라 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다고,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p. 28 中)

 손의 곡선, 이라는 묘사가 좋았다. 평소에는 자세히 보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것들을 보고 있는 이 묘사가 좋았다. 그런 사소한 것들조차 보고 느끼고 기억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어서. 사실 이 책에서 벌어지는 행동들은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비난받을 만한 행동들도 있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저 묵묵히 인물의 시선과 함께 그 행동을 따라간다. 비난은 잠시 미뤄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커피와 담배라는 나와는 거리가 먼 소재에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이 책의 매력이다. 평소의 내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래서 소설이 좋다.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에, 그렇게 따라가고 받아들여도 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인물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한 것이 바로 소설이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져서 우리는 호프집에서 나와 광역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술 취한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취한 사람들을 피하다보니 의도치 않게 자꾸 스님과 부딪쳤다. 그때 어떤 뜨끈한 손이 내 엉덩이를 문지르고 지나갔다. '설마 아닐 거야'하는 순간 또다시 그 손이 내 엉덩이를 문질렀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근처에 손을 가진 사람은 스님뿐이었다. 그 손이 세 번째로 내 엉덩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서 있는 버스에 올라탔다. 출발하는 버스 창문으로 내다보니 스님은 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금연구역에서 몰래 피우는 담배의 맛을 알게 해 주신 S스님은 마지막으로 내게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라는 깨달음도 주셨다. 불성을 얘기하고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성추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 이후로 그 스님의 소식을 물은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날 버스에서 내려 피운 담배의 맛은 이제까지 폈던 것 중 가장 씁쓸했다.
(p. 49 中) 

 이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마지막 그의 표정을 보았던 인물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복잡한 감정이었을 거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결국 저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보면, 나는 그 사람이 했던 그 번지르르한 말조차 낮게 평가한다. 다 헛소리였다고, 그럴싸하게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S스님에 대한 앞의 이야기는 그런 감정을 배제한 채 좋았던 시절의 기억이 담겨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씁쓸했던 담배의 맛에는 그저 씁쓸함만 담긴 것이 아니었을 텐데. 실망, 분노, 혐오, 두려움, 불신, 회의.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모두 담겨 있었을 텐데.

 나는 아직도 저 S스님의 행동이 불쾌하고, 그 불쾌함이 앞의 좋은 장면들과 이야기들을 망쳐버려서 그것을 옮겨 적고 싶지 않다.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절에서 지냈던 금욕의 시절에 대한 이야기와 S스님의 불성에 대한 이야기 중 어떤 것을 인용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장면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S스님의 진짜 본성은 마지막의 성추행이었다. 그 누구보다 욕망에 솔직하고 찌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영화과 동기 J가 자신의 단편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연락해왔다. 영화 제목은 <타히티>였는데 대본을 읽어도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이 사는 두 여자가 나오는 영화인데, 집에서 늘 비키니를 입고 있는 여자가 있고 옷 좀 제대로 입고 있으라고 늘 나무라는 여자가 있다. 둘은 언젠가 함께 타히티에 가는 꿈을 꾸는데 어느 날 정말로 타히티로 떠나기로 한다. 옷 좀 제대로 입고 있으라고 나무라던 여자는 공항에서 비키니를 입고 여행가방을 들고, 집에서 늘 비키니를 입는 여자를 기다린다. 집에서 늘 비키니만 입던 여자는 멋진 트렌치코트를 입고 아메리카노를 들고 여행가방을 들고 오다가 공항 앞에 비키니를 입고 서 있는 여자를 보고는 모르는 사람인 척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친구가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알 수가 없다. 더 알 수가 없는 건 내가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p. 55 中)

 역시 S스님의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심오한 내용을 전달하고 싶었음이 느껴졌다. 남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던 나무라던 여자. 남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오히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나무라던 여자. 저 영화를 본다면 처음에는 나무라던 여자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마지막에는 나무라던 여자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진짜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행동하던 것은 비키니를 입던 여자였을 것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영화 속 두 인물이 어떤 생각으로 저런 행동들을 했는지를 이해해야 하고, 바뀐 두 모습의 결말을 통하여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을지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이 뒤에 영화를 찍던 주인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과 감정들이 많이 존재하니까.

 

 

담배에 불을 붙일 때면 함께 불려 나오는 기억들. 방처럼 펼처지는 기억들.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집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중략) …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기억을, 감정을 잠시 소환하는 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p. 67 中)

 담배를 피우는 이유, 정확히는 끊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부분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통하여 어떤 기억과 감정을 생생하게 끌어낸다고 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에게 음악이 이런 것임을 느꼈다. 특정 노래를 들으면 특정 사람들이 떠오른다. 특정 노래를 들으면 특정 기억이 떠오른다. 특정 노래를 들으면 특정 사람들이 떠오르던 그때의 장소와 나의 행동과 감정들이 떠오른다. 나도 이 책처럼 2가지의 소재로 제목을 짓는다면 그중 하나는 음악이 될 것 같다.

 후각이 함께 하는 기억은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 담배가 그런 후각의 역할을 해주었을 것 같다. 나는 후각에 관련된 기억은 별로 없다. 후각과 기억에 대한 얘기를 언젠가 다른 책에서도 봤었고, 그 책의 리뷰를 썼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났었다. 그게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뒤다. 그가 바란 것은 이해가 아니라 그저 존중이었던 것 같다.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존중하지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듯이 좋아하지만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 존중해도 그것을 상대방이 느끼도록 표현 못 할 수도 있고. 어쨌든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미리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상처 받지 않도록 방어막을 미리 쳐놓는 데에만 내 온 노력을 다 쓰고. 가장 큰 실수는 정확하게 알려는, 알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다.
(p. 88 中)

 연인 사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대화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그'에게 맞추기 위해 담배도 술도 고기도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런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고기를 썰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말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바란 것은 그녀가 자신과 똑같은 생활양식을 갖추는 게 아니었을 거다. 물론 똑같이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맞출 수 없다면 맞출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저 그에게 맞추기만을 하다가 그의 앞에서 예고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그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다. 존중이란 건 꼭 그 행동을 같이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생활방식을 인정하고, 나는 나의 생활방식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존중할 수 있다. 세상에 똑같은 취향으로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다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라테 손님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읽고 있다. 그 손님은 2년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을 읽고 있다. 
(p. 125 中)

 울면서 읽기 시작한 책의 후반부에서는 피식 웃어버렸다. 라테 손님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정말 이 책 저 책에 많이 등장하는 책인 것 같다. 중학생 때 어떤 책에서 저 제목을 보고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출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읽지 못한 채 반납하고 다시 대출하고 다시 반납하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1권도 읽지 못했다. 나는 10년 넘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을 읽고 있다. 사실 책이 그렇게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는 점이 읽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당신의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2가지를 고른다면 무엇인가. 하나는 음악이라고 했었는데 다른 하나가 지금 막 질문과 동시에 결정되었다.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질문을 구체화하면서 답이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제목을 짓는다면 그것은 "글과 음악"이 될 것 같다.

 '글'을 읽으면서 들은 '음악'은 다음의 유튜브 영상이다. 왜 울 수밖에 없었는지 들어보면 바로 알 것이다. 책이 짧아서 이 영상이 끝나기 전에 다 읽을 수 있다. 커피를 좋아한다면 커피와 함께,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음악과 함께 가볍기 읽어보기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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