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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by 미뉴르 2019. 12. 11.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일반판
국내도서
저자 : 스미노 요루 / 양윤옥역
출판 : 소미미디어 201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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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변에서 다들 재밌다고, 울면서 보게 될 거라고 해서 영화를 먼저 보았다. 그런데 영화를 본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슬프긴 했지만 그렇게 눈물 펑펑 흘릴 정도는 아니었달까.

 혹시나 책으로 읽으면 감정선이 더 와 닿아서 눈물을 흘리게 되지 않을까 하며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된 더 큰 이유는 주인공의 관계에 있다. 하루키와 사쿠라의 관계.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닌 제3의 관계.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의 주제이다. 가족 간의 사랑도, 연인 간의 사랑도, 친구 간의 사랑도, 나 자신에 대한 사랑도 아닌 제3의 사랑.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라서 글로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이 영화가 그 내용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아서 읽어보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걸 읽으면 내가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책을 다 읽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와는 또 다른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말이다.

 책과 영화의 내용은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흡사하다. 반전까지도. 그 반전의 복선이 꽤 여러번 나와있는데도 영화를 볼 때는 충격적이었다. 이미 충분한 비극이 예견된 자에게 그 이상의 비극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게 가혹할 필요는 없다고 믿고 있기에.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도서실 정리 같은 것에 써도 괜찮아?"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던진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연히 괜찮지."

 "괜찮지 않은 거 같은데?"

 "그래? 그럼 그밖에 뭘 해야 하는데?"

 "그야 첫사랑을 만난다든가 외국에 나가 히치하이킹으로 마지막 죽을 자리를 정한다든가, 아무튼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그녀는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없지는 않다, 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틀림없이,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p. 19~20 中)

 

 결말을 알고 보면 참 슬픈 장면이다. 여주인공 사쿠라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은 책이나 영화나 초반부터 기본 전제로 끌고 가기 때문에 스포되는 부분은 아닐 거다. 하루키와 사쿠라 모두 언제 죽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거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데도 우리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지금 하고 있지는 않다. 다들 막연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시간이 충분히 있다고 여기는 것일 테지.

 

 "아니, 나도 너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런 얘기 안 해. 다들 슬퍼하잖아. 근데 넌 대단해. 머지않아 죽는다는 클래스메이트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주잖아. 나라면 아마 못했을 거야.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막 하는 거야."

 "너무 높이 평가해주셨네."

 진짜로, 정말로.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는 내 앞에서 슬픈 표정은 안 하잖아. 혹시 집에 돌아가서는 나를 위해 울어준다거나?"

 "안 울어."

 "좀 울어주지."

 울 리가 없다. 나는 그런 비합리적인 짓은 안 한다. 슬퍼하지도 않고, 더구나 그녀 앞에서 그런 감정을 내보일 일도 없다. 그녀가 남들 앞에서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걸 대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p. 40 中)

 '그녀가 남들 앞에서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걸 대행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말이 머리를 쿵 하고 때리는 느낌이었다. 애써 밝은 척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모른 척해주었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또 모른 척하지 못하고 괜히 더 슬퍼해주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과연 어느 것이 정답이었을까. 아마 상황마다 사람마다 정답은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른 척해주던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나의 첫사랑처럼. 

 

 "우리, 남들 눈에는 커플로 보일까?"

 "그렇게 보인다고 쳐도 사실이 그렇지 않으니까 상관없어."

 "칫, 쿨하시네."

 "그렇게 보려고 마음먹으면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은 모두 다 커플로 보이겠지. 그리고 겉모습만으로는 너는 도저히 머지않아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중요한 것은 남들의 평가가 아니라 실제 내용이야. 너도 말했었지?"

(p. 46 中)

 

 이 책 역시 한 사람을 계속 떠올리며 읽었던 지라 그 사람이 생각났다. 우리는 커플로 보였을까. 그랬을 것 같다. 이들의 대화가 어쩜 우리의 대화랑 그리 닮았는지. 말투가 딱 우리 관계같다. 그리고 이들은 사랑이 아니었지.

 겉모습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는 정말 수없이 많다. 나 또한 그랬던 순간들이 있고. 도저히 머지않아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일상을 원하는 사쿠라에게는 좋은 일이었겠지만.

 

 "어디로 가려고?"

 내가 물어보자, 실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통통 튀듯이 말했다.

 "파라다이스!"

 낙원이라니, 그런 장소가 꽃다운 여고생의 생명을 앗아가는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라고 나는 기이하게 생각했다.

(p. 64 中)

 역시 결말을 알고 보면 너무 슬픈 장면이다. 책이 남주인공 시점이라서 영화와는 달리 이렇게 남주인공의 생각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좋았다. 남주인공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은둔형 외톨이 캐릭터인데, 그 특성이 이런 생각들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그리고 사쿠라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모습들도. 그래서 그의 감정선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만큼 슬플 줄 알았는데 결국 나는 울지 않았다는 결론이ㅠㅠ

 

 "지금까지 남자친구가 세 명 정도? 미리 말해두겠는데, 모두 다 진심으로 좋아했어. 중학생 때의 연애는 그냥 장난이라고 말하는 애들이 가끔 있지만, 그건 자신의 사랑에 책임지지 못하는 바보들이나 하는 말이야."

(p. 72~73 中)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다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사랑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는 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사람들이야 이제 기억도 안 나는 추억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초등학교의 첫사랑도, 중학교 때의 짝사랑도. 그 이후로 그 정도까지 좋아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순수하기에 가장 깊이 좋아했던 시절이 중학교 시절이다. 남들이 그 시절의 사랑을 무시하면 화가 날 정도로. 그렇다고 그 이후의 사랑이 결코 얕았던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약했을 뿐이지. 누군가에게 푹 빠져서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고 있던 기억, 그 사람으로 머릿 속이 가득 차서 내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름을 적던 순간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한 번도 핸드폰에 저장하지 못했던 그 아이의 번호를 나는 여전히 외우고 있다. 그 아이가 줘서 처음 먹어보았던 옥수수 수염차를 나는 아직도 당연한 듯 사먹고 있다. 

 

 "저기, 너 말이야."

 "응, 뭔데?"

 "정말 죽어?"

 그녀의 표정이 일순 사라졌다. 그 표정만으로도 이런 질문은 안 하는 게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후회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의 표정은 다시 평소처럼 눈이 핑글핑글 돌게 변화했다.

 처음에는 웃음, 그다음에는 난감함, 쓴웃음, 화남, 슬픔, 그리고 다시 난감한 얼굴로 되돌아왔다가 마지막에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웃으며 말했다.

 "응, 죽어."

(p. 78~79 中)

 사쿠라가 죽은 것보다 어쩌면 더 슬펐던 장면이다. 이 장면을 읽고서는 더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었다. 저 질문은 정말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에서는 다 포착할 수 없었던 표정변화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이미 정해진 사실을 이렇게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사쿠라에게는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었을까. 죽는 걸 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그것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 텐데.

 처음에는 역시 늘상 웃는 사쿠라답게 억지로 웃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웃으려고 했지만 쓴웃음이 되었을 거다. 결국에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 알면서도 이런 질문을 한 상대방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는 세상에게 화가 났을 테고, 슬펐을 거다. 대답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난감해하다가 다시 힘들게 웃으면서 죽는다는 말을 하는 그 순간까지.

 계속 사쿠라와 내가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장면에서도. 

 

 그녀는 정말로 도전해볼 생각인지, 평소보다 더 표정에 힘이 넘쳤다. 짧은 기간이라고 해도 목표가 생긴다는 것은 인간을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나와 비교하면 그녀의 반짝임은 훨씬 더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p. 151 中)

  꿈과 목표를 가지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의 모습. 정말 멋진 모습이다. 나도 꽤 여러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았고, 내가 그런 모습을 가진 적도 있었다.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렇기에 꿈을 가진 그녀는 분명히 아름다웠으리라.

 

 (중략)… 내가 여학생의 패션에 대해 좋고 나쁨을 알 리가 없어서 매번 잘 어울린다는, 칭찬도 폄훼도 아닌 말을 골라 들려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그 말에 진심으로 기뻐해줘서 다행이었다. …(중략)… 앙갚음으로 그녀에게는 울트라맨 소프트비닐 인형을 사줬다. 잘 어울린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여전히 기뻐해줬다.

(p. 152 中)

 사쿠라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작은 말 한마디에도 항상 기뻐하는 그런 소녀였다. 왜인지 내 모습과 자꾸 겹쳐지는 부분도 있었다. 저 둘의 모습에 나와 그 사람을 투영시켜서 그런가. 이상한 별명을 붙여주었는데도 귀엽다며 좋아하던 내가 떠올랐다. 그냥 함께여서 즐거웠고 행복했던 거겠지. 

 

 "그럼 내가 대신 알려줄게. 누군가가 '글쎄'나 '흠'으로 대답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너의 질문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이야. 방금 어딘가에서 '글쎄'라는 말, 들리지 않았어?"

(p. 163 中) 

 정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었다. 글쎄라는 말, 그런 말인 거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사쿠라는 저런 냉대에 굴하지 않았다. 나도 차라리 저렇게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굴하지 않고 계속 다가갈 수 있었을까. 그래도 미움은 안 받고 싶어서, 부담은 안 주고 싶어서, 친구로라도 남고 싶어서 그만 둔 내 마음을 말이지.

 

 그래서 그녀의 시간을 빼앗은 나를 미워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만일 그녀가 일 년 뒤에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녀와 식사할 일도 여행할 일도, 집에 가서 어색한 상황을 만들 일도 없었다. 그녀의 죽음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하지만 죽음 따위, 누구에게라도 찾아올 운명이다. 그러니까 나와 그녀가 만난 것은 우연일 뿐이다. 우리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우연일 뿐이다. 의지나 감정에 따른 순수성이 나에게는 전혀 없었다.

(p. 191 中)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p. 196 中)

 

 위는 하루키의 생각이었고, 밑은 사쿠라의 말이다. 여기서도 결국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투영시켰다. 그 사람은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라고 여겼던 걸까.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선택이었는데 정말. 그 사람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나는 사쿠라처럼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내 선택에 따라 사람의 관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이번을 제외하고는. 마음 먹은대로 안 돼서 정말 안타깝네.

 

 "그걸 말해버리면 인간관계가 재미없어지지.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정도 연애도 재미있는 거야."

(p. 208 中)

 

 딱히 동의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도 재미있는데. 알기에 재미있는 부분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뭐, 모를 때는 모를 때의 재미가, 알 때는 알 때의 재미가 있는 법이니까.

 

 "산다는 것은……."

 "……."

 "아마도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아, 그런가.

 나는 그걸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시선이며 목소리, 그녀의 의지의 열기, 생명의 진동이 되어 내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인정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 누군가를 싫어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짜증난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 누군가를 껴안는다, 누군가와 스쳐 지나간다…. 그게 산다는 거야. 나 혼자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누군가는 싫어하는 나, 누군가와 함께하면 즐거운데 누군가와 함께하면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나, 그런 사람들과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산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마음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있기 때문이고, 내 몸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잡아주기 때문이야.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나는 지금 살아있어. 아직 이곳에 살아있어. 그래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어. 나 스스로 선택해서 나도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것처럼."

(p. 222 中)

 사쿠라의 삶에 대한 정의이다.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 나의 삶의 정의는 아마 하루키의 입장에서 내리는 정의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쿠라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고, 하루키는 사람들과의 관계와는 별개로 개인 그 자체로만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 또한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타인으로 인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타인이 없어도 나는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이다. 나의 행복, 나의 기쁨. 이 감정이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지, 타인의 존재가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들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나의 감정을 증폭시킬지는 모르겠지만. 

 

 불퉁거리면서 나는 얼굴이 폭발해버릴 만큼 창피해졌다. 그녀를 걱정했다는 것은 잃고 싶지 않다는 뜻이고, 꼭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p. 237 中)

 필요하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 감정이 사랑이 아닌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역시 이들의 감정과는 많이 달랐다. 걱정했다, 잃고 싶지 않다, 필요하다, 그리고 보고싶다. 옆에 있고 싶다. 이런 추가적인 감정들이 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아, 그렇다. 그녀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의 선택 속에서 나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테이블에 높아둔 문고본을 손에 드는 것을 선택했다.

 문고본을 펼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도서위원이 할 일을 가르쳐주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의 만나자는 요청에 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식사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나란히 걷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여행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가고 싶어하는 곳에 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을 선택했다.

 진실을 선택했다. 도전을 선택했다.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남긴 아침식사를 먹어주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함께 피에로 마술사의 연기를 보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마술 연습을 추천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울트라맨을 사주는 것을 선택했다. 그 지역 선물을 선택했다.

 여행은 즐거웠다고 대답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의 집에 가는 것을 선택했다.

 장기 두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를 떼어내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를 밀어 쓰러뜨리는 것을 선택했다. 학급위원인 그를 상처입히는 것을 선택했다.

 그에게 얻어맞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화해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의 병문안을 가는 것을 선택했다. 병문안 선물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수업 내용을 가르쳐주는 것을 선택했다. 집에 돌아올 타이밍을 선택했다.

 절친 쿄코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마술을 봐주는 것을 선택했다.

 진실이냐 도전이냐를 선택했다. 질문을 선택했다.

 그녀의 팔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를 추궁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 함께 웃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를 꼭 끌어안는 것을 선택했다.

 몇 번이나 그렇게 끌어안는 것을 선택했다.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 텐데 나는 분명코 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했고, 그 끝에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이전과는 달라진 나로서 이곳에 존재한다.

 그렇다, 방금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사실은 풀잎 배 따위가 아니다. 휩쓸려가는 것도 휩쓸려가지 않는 것도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한다.

(p. 246~247 中)

 책 내용이 다 요약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풀잎 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는, 물 흐르듯 살아가는 존재 말이다. 스스로 움직일 힘이 없는 존재. 하지만 그는 이렇게 수많은 선택들을 해왔다. 사쿠라에게 더 차가워질 수 도 있었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사쿠라와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 그 사람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 우연보다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길 것 같다. 그의 선택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 선택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고.

 

 그녀가 나에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준 그때에.

 내 마음은 그녀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네가…….

 나는 실은 네가 되고 싶었어.

 타인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타인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로 하고 보니 내 속마음과 딱 맞아떨어져 속속 스며드는 것을 깨달았다. 저절로 입가가 쭉 올라갔다.

 나는 어떻게 하면 네가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네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다면, 하고 깨달았다. 분명 그런 의미의 속담이 있었다.

 한참 더듬어본 끝에 생각이 나서 나는 그 말을 그녀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너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가고 싶다.

 자판을 한참 두드린 다음에 곧바로 지워버렸다. 이런 속담으로는 뭔가 재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에 좀 더 적합한 말이 있을 텐데.

 다시 한 번 더듬어보자 기억의 한 귀퉁이, 아니 한가운데인가, 거기 어디쯤에서 말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그 말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다. 나 혼자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선물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말을 그녀의 휴대폰을 향해 보냈다.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p. 250~251 中)

 

 나는 너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대단한 사람.

 좋아, 내친 김에 네가 지난번에 했던 질문에도 대답해줄게. 어때, 서비스가 좋지?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

 엇,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웃음) 그렇다면 읽지 말고 그냥 건너뛰어도 돼.

 나는 말이지…, 너를 동경했어.

 얼마 전부터 계속 느낀 바가 있었거든.

 내가 너 같았다면 좀 더 어느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슬픔을 너나 우리 가족에게 내보이는 일도 없이,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만, 오로지 나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나 자신의 책임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지금의 내 인생은 최고로 행복해. 하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도 단지 혼자만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너를 나는 동경했어.

 내 인생은 항상 주위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것이 전제였어.

 어느 순간에 문득 깨달았어.

 내 매력은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없어서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중략)

 하지만 너는, 너만은 항상 너 자신이었어.

 너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너 자신을 응시하면서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었어.

 나도 나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싶어.

 (중략)

 죽기 전에 너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가고 싶어.

 ……라고 써놓고 나서 문득 깨달았어.

 이런 흔해빠진 말로는 안 되겠지? 나와 너의 관계는 이런 흔해빠진 말로 표현하기에는 아까운 관계니까.

 그래, 너는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역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p. 288~291 中)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던 것 같다. 위에는 하루키가 사쿠라를 떠올리며 문자를 보내던 부분, 뒤는 사쿠라가 하루키에게 남긴 글이다. 둘은 서로를 닮고 싶어했다. 자신과 정 반대되는 모습을 가진 상대방과 닮고 싶어했다. 이게 바로 이들의 관계이다. 너무나 다른 둘이 서로를 '동경'했다. 서로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었다.

 

 사랑이라느니 우정이라느니, 그런 건 아니지, 우리는. 만약 네가 나를 사랑했다면 어떻게 했을지, 그건 좀 마음에 걸린다.

(p. 286 中)

 앞에도 말했지만 나는 이들의 관계가 사랑이 아니기를 바랐다. 제3의 관계이기를 바라고 책을 읽어나갔다. 그 바람은 몇몇 문장에 의해 무너졌지만.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몇 번이나, 정말로 몇 번이나,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이를테면 그거, 네가 첫사랑 얘기를 해줬을 때, 나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어. 호텔 방에서 술을 마셨을 때도 그렇고, 처음으로 내가 먼저 껴안았을 때도 그렇고.

 (p. 286 中)

 

 실제 이야기는 글쎄, 다음에 다시 너를 만났을 때 해주게 될까?

 만일 내 진짜 첫사랑 같은 여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때는 정말로 그 아이의 췌장을 먹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p. 317 中)

 

 위 두 구절이 바로 내 바람을 져버린 구절들이다. 사쿠라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쿠라를 첫사랑 '같은' 여자라고 표현했다. 해석하기에 따라 역시 사랑이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랑과 비슷하지만 다른 감정. 나는 다른 감정이기를 바랐는데. 저 말들이 결국 사랑한다는 말임을 부정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들의 상황이 나와 너무 비슷하기도 하고 너무 다르기도 해서, 그리고 이들에게서 또다른 사랑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굉장히 열심히 책을 읽었다. 구절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아두었다. 여기 적은 부분들 말고도 하루키는 사쿠라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준 적이 없다거나, 하루키의 이름이 사쿠라가 죽기 전까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등의 특징들도 있다. '~~클래스메이트'로 자주 나오거나 '?????군'으로 나왔다. 벚꽃이 봄에 피는 이유에 대한 부분도 있었고. 

 이들과 같이 서로 마음이 통하는 엔딩이 아니라서 슬프지만, 나는 살아있고 살아갈 거니까.

 

 

18.01.20 본인 작성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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