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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by 미뉴르 2019. 12. 13.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국내도서
저자 : 이도우
출판 : 시공사(단행본) 201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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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맨스 소설계에서는 유명하다고 하여 추천받아 읽게 된 책.

읽는 내내 드라마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인들에게 드라마같다라고 표현하니 모두들 막장드라마를 떠올리던데 내가 말하는 드라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름 최근에는 스토리가 탄탄한 퀄리티 있는 드라마만 찾아보았으니까.

 계속되는 우연적인 요소, 한 폭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장면들, 눈에 보이는 듯한 인물의 표정과 심리 묘사, 독자마저 설레게 만드는 대사들, 주인공에 대한 강한 감정이입까지. 이게 바로 내가 말한 드라마같은 부분들이다. 굳이 한국드라마라고 콕 집어 말했었다. 한국드라마에서는 사랑이 빠지지 않으니까. 설레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마음고생하고, 고난 끝에 결국 대부분 해피엔딩이 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마음을 울린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끔 심리적인 몰입을 유도한다.

 항상 여전히 드라마같은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나에게 이 책은 내가 바라는 사랑의 모습을 구체화시켜놓은 책이었다.

 책을 읽는 중간, 그리고 다 읽고 난 후, 나는 울고 있었다. 해피엔딩인데 울고 있는 내가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들의 사랑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내 사랑이 슬퍼서였다. 이들은 이렇게 해피엔딩이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사랑을 이루는 것 같은데 내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니어서였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이 무사하지 않으니까, 네 사랑이라도 무사하기를.

 

 "건피디님, 마지막 곡으로 나갔으면 하는 노래가 있는데. 신청곡이에요."

 시디를 트랙에 올려놓으며 건이 흘끔 돌아보았다.

 "뭔데요?"

 "백년설의 <마도로스 수기>요."

 문득 그의 표정이 애매해지더니 이맛살을 슬쩍 찌푸리며 거절의 표시로 손을 내저었다.

 "싫어요, 그 노래는."

 "왜요?"

 "나, 그 노래에 알레르기 있어요."

 (중략)

 "아뇨, 뭐 피디가 싫다는데 됐어요. 할 수 없죠."

 "스무디 사주면 틀어주지."

 건이 씩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p. 52~53 中)

 책 초반부를 읽을 때는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와 남자 끼부리는 것 봐.' 이러면서 읽었었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끼부림의 최절정이었다. "스무디 사주면 틀어주지." 이 말투가 상상이 되었다. 장난스레 씩 웃으며 말하는 이 남자. 사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이 남자. 명백한 데이트 신청이었다. 너무나 설레서 책을 덮고 이불킥을 한 번 했더랬다.

 

 

 '경혜야 너무 사랑해. 그런데 너 세상 그렇게 살지 마.'

 

 진솔이 물끄러미 그 낙서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글씨가 적힌 벽면을 살짝 문질렀다. 

 "이거 쓴 사람, 너무 마음 아팠나 보다."

 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날을 회상했다.

 "응. 나, 그 청년 기억나요. 밤늦게 친구들하고 같이 왔다가, 학생들 같았는데… 취해서 탁자에 엎드려 있더니 부스스 일어나서 낙서하더군요. 가고 난 뒤에 치우면서 보니까 그렇게 써놨데요."

 건이 피식 웃었다.

 "기왕이면, 경혜한테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지."

 "자기도 몰랐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경혜가 틀렸다는 건 알아도, 맞는 건 또 못 가르쳐주는 법이거든…."

 (p. 74~75 中)

 건의 오랜 친구인 애리와 선우가 운영하는 인사동 찻집 벽면에 쓰여있던 낙서. 별 생각 없이 지나칠 수 있는 낙서였다. 진솔은 그것을 보고 그것을 쓴 사람의 감정을 느꼈다. 아픔. 건은 특유의 장난기가 남아있었는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선우는 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세상 그렇게 살지 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실 남의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있을까. 그 결과가 어떤 지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게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결말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는데.

 

 

 "난 종점이란 말이 좋아요. 몇 년 전에 버스 종점 동네에서 산 적도 있었는데, 누가 물어보면 '157번 종점에 살아요.' 그렇게 대답했죠."

 "종점? 막다른 곳까지 가보자, 이런 거?"

 "아니, 그런 것보다는… 그냥 맘 편한 느낌. 막차 버스에서 졸아도 안심이 되고, 맘 놓고 있어도 정류장 놓칠 걱정 없이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는… 그런 느낌이요."

 (p. 92~93 中)

 나도 5호선 종점에 산다. 정확히는 5호선 종점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간다. 진솔의 말에 많이 공감했다. 가족들하고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5호선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5호선만 타면 졸리다는 얘기였다. 특히 집으로 오는 길 말이다. 정신없이 잔다고. 그 때 얻은 결론이 우리가 '종점까지 오기 때문'이었다. 종점까지 오기 때문에 졸면서도 무슨 역인지 들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저 모두가 내리는 순간 함께 내리면 된다. 마지막까지 편한 마음으로 자도 된다. 긴장상태와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피곤함이 어떻게 다르게 쏟아지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점에 사는 게 좋은 건 아니다. 집이 그만큼 멀다는 뜻이니까. 차라리 2호선 막차의 종점, 이런 느낌이라면 좋겠지만.

 

 

 싱긋 웃는 건의 미소가 눈부셔 진솔은 어쩐지 두렵고도 짠한 마음이었다. 해변을 향해 돌아서는 그의 어깨와 등, 짧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깨끗한 목덜미도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서해 바다 위로 저녁노을이 물들어 수평선은 푸르고 붉은 색감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p. 106 中)

 진솔의 감정이 배경 묘사를 통해 나타난 부분이었다. '싱긋' 웃는다. '눈부시다'. '두렵고도 짠하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온통 젖어 있었다.'

 진솔이 대체 언제부터 건을 좋아했는가, 이 부분에 대해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이미 좋아하고 있거나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건을 쳐다보는 진솔의 시선이, 건의 주변이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되는 건 사랑에 빠졌기에 가능하다. 그 사람이, 그 주변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 사람이 좋기 때문인가 주변이 좋기 때문인가. 유난히 이 모습이 눈에 와 박힌다면 그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닐까. 강렬한 인상이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장면. 뒤에 더한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휴대폰 벨이 다시 울린 것은 그때였다. 움찔 놀란 그녀가 가만히 폴더를 열었다.

 "다 썼네? 나와요."

 "… 어떻게 알았어요?"

 "십 분마다 메일함 체크하고 있었어요. 한 시간 전부터. 사분 전에 넣었네."

 (중략)

 "저런… 두 시간 반을 기다린 사람한테 이렇게 무정할 수가. 나, 상처받았소."

 그녀의 입에서 그만 실소가 새어나왔다. 나, 상처받았소? 어이없기도 하고 뭐랄까… 아, 따스하게 사랑스럽기도 했다. 젠장.

(p. 147 中)

 2시간 반 동안, 10분마다 메일함을 체크하며 그녀가 원고를 다 쓰기를 기다렸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런데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건이 진솔을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다. 저런 대화들, 저런 표현들, 저런 행동들, 요즘 흔히 말하는 '썸타는' 관계에서 하는 것들 아닌가.

 그래서 후에 마음 아팠던 진솔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제 3자가 보기에도 이랬는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당사자일수록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고 김칫국 마시는 법인데. 이미 사랑에 빠진 진솔은 오죽했을까.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진솔 씨는, 나한테 일기장 같은 사람이에요."

 "… 일기장?"

 "표현이 좀 그런가? 아무튼 어제도 이화동 우리 집까지 강제로 데리고 갔었지, 오늘도 당신이랑 마무리가 안 되니 뭐가 허전했지. 수첩에 몇 줄 적는 것처럼 꼭 진솔 씨한테 하루를 정리하게 되잖아요. 요즘 계속 그랬으니까."

(p. 155 中)

 여기서 이미 어렴풋이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 저 남자가 말하는 일기장의 의미가 사랑은 아니라는 것을. 보고싶어서 그녀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저 허전해서. 그냥 그녀를 만나는 게 익숙해져서. 그냥 그게 너무나 당연한 거라서. 그래서 진솔은 이 얘기를 듣고 마냥 좋아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본인 가게에서나 들으라고 해요. 너무 길고, 오늘은 안 돼."

 진솔도 웃으며 선우에게 전했다.

 "미안하지만 가게에서 들으시래요."

 "저런, 그러죠 뭐. 참, 모레가 애리 생일이라 조촐하게 파티할 건데 건이랑 같이 오세요."

 (중략)

 "그리고 건이한테 대신 말 좀 전해줄래요?"

 개구쟁이 같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선우가 천진하게 속삭였다.

 "엿 먹으라고…."

 진솔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이상야릇 찌푸린 채 건을 응시했다. 의아하게 마주보는 건에게,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전달했다.

 "… 엿 먹어요."

 그의 눈썹이 '뭐?' 하듯 슬쩍 치켜 올라갔다. 옆에서 홍헌표가 휘둥그레진 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깔끔하게 입꼬리를 씩 올려주곤 주조정실을 나와버렸다.

(p. 163 中)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폭소했던 부분이다. 항상 부드럽고, 느리고, 다정한 이미지였던 선우가 저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너무나 진지하게 표정까지 그대로 전달하는 진솔이 너무나 귀여웠다. 평소엔 조용했던 진솔의 갑작스런 발언에 주변에서 당황하는 모습도 너무 웃겼다.

 내가 저런 말을 전달해달라고 들었다면 내가 오히려 당황했겠지만.

 

 

넌, 늘 춘향 같은 마음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p. 206 中)

 건의 시집 속지에 들어있던 싸인이다.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 그러나 전하지 못한 메세지.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빌어주는 글. 왜 전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야 되기 때문일까. 절대 말할 수 없는, 말해서는 안되는 바로 그 사랑을. 

 당신을 바라보는 춘향이도 있음을 그가 더 빨리 알아주었다면, 진솔은 덜 아팠을 텐데.

 그대들의 사랑이 무사하기를.

 

 

 12년을 지내면서도 늘 객지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진솔은 오늘 처음으로 서울 하늘 아래 자신의 집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비로소 두 번째 고향이 될 것만 같은.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말들이 사람의 의지를 이기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일까. 진솔은 가슴에서 넘쳐 오르는 안타까움으로 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무심히 돌아보았다. 건의 눈썹이 의문스럽게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말이 되어 나오는 것처럼, 진솔은 그를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나요… 할 말이 있어요."

 그도 잠자코 그런 진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당신 사랑해요."

 아, 이런 믿기지 않는 순간에도 산의 공기는 얼마나 맑게 느껴지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선선하고, 가을 기운은 왜 이렇게도 마음을 싸-하게 만드는지. 심장이 두근거려 두 손을 꼭 깍지 끼긴 했지만 진솔은 떨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래. 그녀의 마음이 속삭였다. 이렇게 난 고백해 버린 거지. 스스로 내 발목을 잡은 거지. 어떤 대답을 듣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p. 218 中)

 아름다웠던 진솔의 고백장면이다. 분위기에 취하고, 감정에 취한 고백이었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가는 건 말이다. 그냥 사랑한다고 했을 뿐인데 그 어떤 달콤한 말보다도 절절했다. 그냥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냥 그렇다고. 알고는 있으라고.

 그리고 고백만큼 와닿았던 건, 서울이 비로소 두 번째 고향이 될 것만 같다던 그 말이었다. 내가 서울에 적응하지 못했던 시절,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서울을 좋아하게 되었던 그 과거가 떠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사람. 진솔도 그 정도의 감정인 것이다. 다시는 그렇게까지는 사랑하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깊은 사랑.

 

 

 '생각날 때마다 마셨더니

 이젠 마실 때마다 생각나네 시팔'

(p. 223 中)

 애리네 가게 벽면에 적혀 있던 또다른 문구. 이것 또한 너무 아프다.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기억을 잠식하는, 잊으려 애쓰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일상이 되는 그런 것. 이 사람이 너무 많이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잊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되면 다시는 술을 못 마실 것만 같아서.

 

 

 "갑자기 웬 창경궁에 올 생각을 했어요?"

 (중략)

 "진솔 씨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여기서 밤이 될 때까지 있어야지."

 건이 장난처럼 말했기 때문에 그녀도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다이어리 때문에?"

 "그런 원대한 목표는 못 잊지."

 (중략)

 -관람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립니다. 폐관 시간이 임박했으니 입장하신 관람객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출구 쪽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미처 가보지 못한 저편 풍경을 아쉽게 남겨두고 돌아서려는데, 건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안 나간다니까? 따라와요."

 진솔의 눈동자가 커졌다.

 "정말? 농담 아니고?"

 "아니고."

 그는 쿡쿡거리더니, 반대쪽 단청 건물을 향해 진솔을 데리고 뛰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덩달아 달려가며 그녀가 웃음 반 찡그림 반 소리쳤다.

 "금방 들킬 거예요!"

 "공진솔 혼자면 들키지!"

 짓궂게 놀리는 건은 그 순간 자신만만한 소년 같았다. 붉은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선 빈양문을 지나 내전으로 들어서니 인적 하나 없는 고적하고 드넓은 공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팔각기와 처마가 노을 비낀 하늘로 곡선을 그리고, 단풍을 떨어뜨린 나무들과 푸른 상록수들이 내전을 지켜온 오랜 수령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가라앉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 궁궐 마당에 깔린 흰 포석이 기묘하게 도드라졌다.

 "숨을 데가… 없을 것 같아요. 사방천지 이렇게 넓은데도."

 눈앞의 풍경이 너무나 막막하게 느껴져 진솔은 천천히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건이 조용히 웃었다.

 "당신 하나 못 숨길 것 같아요? 내 등뒤도 있어요."

 그의 음성이 따스해서 진솔의 마음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건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북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곳은 경춘전이었고 뒤로는 상록수들이 담장까지 빽뺵이 들어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요. 순찰 마칠 때까지."

 나무숲 사이로 깊이 들어서서 그들은 바닥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레 어스름 속에 섞여들었고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와 나무가 풍기는 특유의 향이 주위를 감돌았다.

 잠시 후 팔에 완장을 두른 궁궐 관리인이 경춘전 마당을 가볍게 훑어보며 지나갔다. 관리인이 사라진 뒤에도 그들은 사위에 어둠이 깔릴 때까지 숲 속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조심스레 숲 밖으로 나왔을 때, 고궁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잠행 성공?"

 "예스."

 건이 웃으며 두 팔을 벌리자 진솔은 기쁜 나머지 그에게로 껑충 뛰어 와락 껴안아버렸다. 마술 같았다. 스스럼없이 그를 이렇게 껴안을 수 있다니. 진솔의 이마 위에서 건이 싱긋 웃었다.

 "이렇게 한번 안아보네. 아, 좋아라."

 그녀도 그만 웃고 말았다. 고궁은 어두웠지만 멀리 담장 밖으로 하늘 높이 솟은 도심의 고층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빛내며 서 있었다. 궁궐 곳곳에 달빛인지 나무에 달아놓은 비상등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이 스며들기도 했다.

(p. 228~230 中)

 아,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아름다웠던, '드라마같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잠행 성공?이라고 물으며 서로 기뻐서 끌어안는 부분. 그 기쁜 마음과 사랑은 연결된다. 아마 여지껏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때는 확실히 사랑에 빠질 것이다. 감격스러운 마음, 그 때의 행복감과 함께 보이는 상대방의 행복한 표정.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 서로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너무나 좋았다.

 진솔의 다이어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 그녀를 위해 창경궁 잠행을 시도하는 건. 내 등뒤에라도 숨기겠다고 말하는 건. 안아봐서 좋다는 말을 하는 건. 그런데 아직 저들은 사귀지 않는다. 건은 아직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귀지 않는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 예뻤는지도 모르겠다.

 공진솔 혼자면 들키지! 라고 말하는 부분이 앞의 '스무디 사주면 틀어주지'라는 장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장난 가득한 말투.

 규칙을 어기고 뛰어다니는 저들의 모습이, 천진난만하고 순수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행복한 순간이고 더 예쁜 순간이다. 사랑스럽다. 사랑은 순수하게 아이처럼 하고 싶다. 그래, 이게 내가 원하는 사랑인가보다.

 

 

 문득 진솔이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건이 고개를 돌리자 서로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에 작은 떨림이 스쳐갔다.

 "… 키스해도 돼요?"

 저도 모르게 나온 속삭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건이 복잡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나한테 하는 말? 안 돼요."

 진솔이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가 그녀에게로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 내가 할 거예요."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본 진솔은 그만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건의 따스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스치듯 닿았다. 왠지 마음이 아파… 두근거림조차 마음 놓고 느낄 수 없는 입맞춤. 한순간의 거짓말처럼 짧은 온기를 남기고 사라지는 입맞춤. 슬픔이 잔물결처럼 가슴에 퍼져와 진솔은 울고 싶어졌다. 

(중략)

 건은 진솔의 이마에 그렇게 마주 기댄 채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으로,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는 그녀의 이마와 머리에, 차례로 키스했다. 그 따뜻한 입김은 그대로 다시 입술을 찾아 내려왔다. 그리고는 이번엔 떠나가지 않았다. 입술 안쪽의 촉촉한 느낌마저 전해지는 느리고도 부드러운 입맞춤. 드디어 진솔의 입술이 열리자,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안고 촉촉한 입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햇고, 계단을 짚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턱을 붙잡은 건의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사랑인가요?

 진솔의 마음이 묻고 있었다. 이 두 번째 입맞춤은, 당신 사랑인가요? 아니면… 결계와도 같은 궁궐의 어둠이 빚어내는 순간일 뿐인가요.

(중략)

 "…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놓지도 않고 끌어안고 손 붙잡고 다닐 거라고. 내 여자한테는 그럴 거라고."

 진솔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엉큼한 놈 아닌데… 오늘 종일 당신 만졌어요. 인사동 찻집에서도 어깨에 팔 두르고, 여기서도 껴안고, 나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갔어."

 건은 낮게 한숨을 쉬더니 진솔에게서 조금 떨어져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요즘 항상 같이 지냈죠. 낮엔 일터에서 만나고, 퇴근하면 둘이 시간 보내고. 당신 원고 쓸 시간까지 뺏는 줄 알면서. 오늘 아침도 오피스텔을 나올 때부터… 진솔 씨 하고 싶었던 거, 하나는 같이 해주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것 중에서, 젠장."

 그는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이야."

 진솔에게 이슬같이 눈물이 맺혔다. 사랑이 뭔지는 몰라도… 사랑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 사랑이 아니면.

 (중략) 그는 날 사랑하기 시작했어.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부질없는 환상일지라도, 스쳐가는 바람이 풍차 날개를 건드리는 것일지라도, 한번은 믿어보고 싶었다. 그의 입맞춤과 포옹을. 그가 시작하는 사랑을. 

(p. 233~236 中)

 두 사람의 첫 입맞춤이 짧게 끝났을 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곧 두 번재 입맞춤으로 이어질 때도, 건이 그저 분위기에 취해서 하는 것일까봐 불안했다. 진솔에게 이게 얼마나 상처가 될 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건은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진솔은 쓰레기가 고루 타도록 막대기로 한 번 들쑤셔주었다. 작은 한숨이 아지랑이처럼 새어 나왔다. 사랑도, 사람 마음도 이렇게 낱낱이 뒤적여가며 볼 수 있다면 좋겠지. 볕을 모아 불씨를 만드는 돋보기처럼, 좋아하는 이의 마음에 누구나 쉽게 불을 지필 수 있다면 좋겠지. 사랑 때문에 괴로운 일 없겠지.

(p. 407 中)

 아, 여기서 한 번 울었던 것 같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의 마음 때문에. 사랑이란 건 참 어렵지.

 

 

 여운이 많이 남는다. 내가 꿈꾸던 사랑을 이들은 이미 해버렸다. 나는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않는다. 평생 버리지 않을 거다. 지금의 사랑이 너무 힘들어 울긴 했지만, 오히려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더 강해졌다. 순수하고 천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8.05.06 본인 작성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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