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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하 쓰던 글이 날아갔다.
굉장히 길게 쓴 글이었는데,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책에 왜 별로 공감하지 못했는지, 최근에 나는 어떤지, 이 책의 어떤 부분에 비판적인지, 이 책의 작가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내가 왜 다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 이런 잡다하지만 소중한 나의 생각들은 다시 쓴다고 해도 똑같이는 쓸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라진 글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는 생각이 되겠지.
이런 것까지 나를 화나게 하면 현재 내 인생은 분노와 화로 가득차 버릴 것 같다.
길고 긴 서론을 제외하고 쓰겠다.
쇼코와 나는 동네의 천변을 걸으며 이야기했다. 쇼코는 우리집 식구들이 다정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적었고, 쇼코에게 느끼는 호감은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쇼코의 팔짱을 꼈다.
(p. 12 中)
이 장면 이후 쇼코의 반응은 동성 사이의 스킨쉽에 대한 거부감이었고, 주인공의 행동을 쇼코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이었다. 그런데 딱 이 장면만 고른 것은, 이 장면에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 때문이었다. 내 생각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던 시절에 나는, 친구가 잡는 손을 나도 같이 잡아주는 것이, 친구가 팔짱을 끼거나 어깨에 기댈 때 거부하지 않는 것이 엄청난 친근감의 표시였다. 내 사회성은 거기까지였으니까, 거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응웬 아줌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봤다.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는 어땠는지,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는지, 바다를 가보았는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색인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음식은 무엇인지. 아줌마의 질문은 공부는 잘하냐, 왜 이렇게 키가 작냐, 커서 뭐할 거냐 물어대는 다른 어른들의 것과는 달랐다.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쁨에 나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아줌마 앞에서 떠들어댔다.
(p. 75 中)
다음 블로그 상태가 좋지 않네. 쓰던 글이 계속 지워진다. 여기서는 아이들을 이용해서 좋은 어른인 척 보이려는 가식적인 어른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심어린 관심이 아니라 그저 보이기 위한 관심.
아이들은 불쾌감과 불편함만을 느낄 뿐이라는 것. 이 이상 다시 쓰고 싶지 않다.
"넌 어른들 말하는 데 끼어들지 마. 네가 대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아빠가 한국어로 소리쳤다. 모두들 젓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봤다. 투이네 식구들 앞에서 아빠에게 그런 식으로 야단맞은 것이 부끄럽고 억울해서 귀가 먹먹해지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p. 79 中)
이 장면은 나도 언젠가 겪어본 장면인 것 같다. "어른들 말하는 데 끼어들지 마."라니. 그럼 그 식사 자리에 아이들은 왜 불렀나. 그저 조용히 앉아서 먹기만 하라고? 아이들이 병풍인가? 아이들의 생각과 표현을 그렇게 억압하고 싶은가?
"네가 대체 뭘 안다고" 이 말로 인해 아이는 더 이상 아빠와 대화를 많이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무시하는 태도. 아이의 자신감을 꺾는 말. 잘 모르면 가르쳐줘야지, 알지도 못한다고 면박을 주는 태도는 아이를 입 다물게 한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나보고 늘 틀렸다고 말하는 어른에게, 나는 내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을 들어볼 생각도 없는 사람이니까. 말해봤자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해버리고 또 나를 틀렸다 말할테니까. 어른이 되면 남의 생각을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해버리는 사람도 많고, 끝까지 듣지도 않고 뒷부분을 마음대로 단정짓고 말을 끊어버리는 사람도 많다. 어떻게든 조언과 충고를 해서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나보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핀트가 어긋난, 아주 길고 장황한 얘기를 들어준다.
그러지 말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나이가 많다고 더 성숙한 것도 아니라는 거, 더 모자란 사람도 많다는 거, 사람은 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다는 거 안다.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애쓰지 말자. 정말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상대방의 얘기를 있는 그대로 끝까지 들어주자. 공감해주자. 그렇게 어떻게든 위에 서려고 하는 어른이 아니라, 옆에서 어깨를 토닥여주는 친구 같은 사람이 진짜 좋은 어른이다. 살면서 나는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다. 존경심이 들 만큼 어른다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다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른스러운 척 충고하려는 그 태도가 내 눈에는 더 어리게 보인다. '그렇게 어른이고 싶으셨나요'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분명 우리보다 훌륭한 부분도 많지만, 그건 티내려고 하지 않아도 티가 난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말할 기회가 생긴다. 그러니까 제발, 그걸 과시하려고 하지 말자. 과시하려는 거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뛰어난 사람의 충고가 필요한 게 아니라, 비슷한 사람의 공감과 위로가 더 절실하다. 왜냐면 우리에게 그 시간과 그 생각은 와닿지 않는다. 우린 당장을 힘들게 살아내야 한다. 세상이 변했으면 살아가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경험을 했다. 당신들이 그 경험을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중간에 말을 끊어버렸을 뿐.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를 경험이 적은 젊은이라고 단정지어 버려서, 당신이 무안해질까 봐 더 이상 말하지 않을 뿐.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게 당신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꺠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p. 85~86 中)
"아이들은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다. 그걸 불완전하다 느끼고 바꾸려드는 것은 어른들이다." 이 말이 다시 한 번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빨리 읽는 아이들은, 누군가 울면 따라 운다. 누군가가 웃으면 함께 웃는다. 공감력이 뛰어난 거다. 그런데 더 성숙해지면, 누군가의 우울함을 모른 척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모른 척 애써 천진난만해진다. 부모님이 싸울 때면 화제를 돌리던 내가, 그 싸움의 원인이 별 게 아닌 척 넘기려는 내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상황이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다. 그 좋지 않은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지막 통화를 하고 사 주가 지났을 때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난 삼 년간 만나줘서 고마웠어. 미안하지만, 이제는 그만 만나자.'
그는 언제나 내가 자신을 '만나주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나를 당황하게 했고, 그를 조금 경멸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났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했고 겸손을 넘어서 가혹할 정도로 자신에게 인색했다.
그에게 나는 스물일곱이 되어 처음 사귄 여자친구였다.
"나는 여태껏 여자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 여자와 사귄다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어."
그는 아주 잘생긴 것은 아니어도 한눈에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고, 박학다식했고, 피아노 연주를 잘했고, 키스도 잘했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속 깊이,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 생각을 직접적인 말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그와 만나는 삼 년간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 속에 그런 메시지들을 넣었고, 종국에는 나마저 그의 믿음에 세뇌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p. 130 中)
일단 저 남자는 못났다. 찌질하다. '경멸'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이들이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헤어지자는 말은 전화로 했어야 했다. 늘 말하지만, 헤어질 때 문자로 통보하는 형태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다. 지난 시간 함께 한 연인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다. 만나서, 만나지 못한다면 최소한 전화로라도 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어라. 상대방의 울음 소리를 들어라. 이전과는 다른 상대방의 목소리 톤을 제발 좀 듣고, 죄책감을 느껴라. 상처주는 사람이 당연히 가져야 할 죄책감을 가져라. 헤어지자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상처주는 사람이다. 헤어짐을 통보받는 입장에서는 나쁜 사람이다. 게다가 저렇게 '만나줘서' 고마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다는 것.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렇게 느끼는 그런 찌질한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던 거다.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 연애를 하는 그 사실 자체를 사랑했던 거다.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와 전혀 없는 남자, 이 중에 고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연애 경험이 없는 남자를 고른다. 나도 그랬었다. 그런데 연애 경험이 없는 남자만 계속 만나게 되다 보니 그 사람들이 왜 경험이 없는지를 알게 되어버렸다.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해본 적이 없다. 조금 힘들고 벽에 부딪히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먼저 다가갔기에, 또는 내가 그 사람들에게 다가와도 된다는 표현을 확실히 해 줬기에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가오지도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진작에 포기했을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겐, 누구를 만나도 자기보다 좋은 사람이었고, 그 중 가장 장벽이 낮은 내가 걸렸던 것뿐이다. 조금 사이가 안 좋아지면 그걸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포기해버렸다. 버티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싸우기도 하고 대화로도 풀어갔을 그런 문제들이었는데. 그것이 화가 났다. 그저 어린 사람들이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화가 났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고, 이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그 모습을 낮추는 게 화가 났다. 못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자기 감정을 잘 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정말 누군가를 깊게 사랑해본 적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선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떨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p. 201 中)
참 좋은 이야기다. 그런 모습까지 사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나는 그런 모습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저 선배와 매우 배슷한 내가, 저런 모습들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적어도 저걸 이해하려면, 저 이야기들을 스스로 먼저 상대방에게 해야 한다. 그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이해해준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런 모습을 처음부터 이해해주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이야기고, 소설같은 이야기다. 그렇기에 저런 모습을 가진 사람은 더 노력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남에게 설명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가 나 있고, 예민하고, 기분이 안 좋은 시기가 계속되고 있다. 연이은 실패는 그 사람의 자존감을 깎아먹거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상 모든 것에 날을 세우게 만든다. 참 한심한 모습이고, 또 불쌍한 모습이다. 이제 내가 뭘 하고 싶은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오늘 밤이 되면, 내일이 되면 또 이 생각은 끊임없이 변하고 감정도 끊임없이 변할 거다. 이 글을 쓰면서 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조금은 나아졌기를.
19.11.14 본인 작성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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