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9분짜리의 짧은 영화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잔잔하고,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을 정도로 조용하다.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겨울의 우울함을 담고 있다.
얼만 전에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 다른 블로그였을 거다.
로맨스 드라마들은 로맨스 외에 주인공들을 힘들게 하는 현실의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취업도, 먹고 살 걱정도, 가족 간의 불화도 없다. 그저 사랑이 전부인 양 행동해도 그들의 삶에는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 글을 보고 나서야 내가 왜 드라마같은 사랑을 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내 삶에는 사랑 외에도 신경써야할 것도, 때로는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것도 너무나 많다. 내 사랑이 작아서가 아니라,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이 현실의 고통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영화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잔잔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보게 되었다.
너무 잔잔했던 나머지 20분 정도를 졸아버려서 다시 보았는데, 그 20분에 영화 주인공들도 자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자는 장면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영화는 정적이고, 가라앉아 있으며, 장면장면을 매우 길게 가져간다. 그리고 느리다.
현실의 고통을 표현했다는 이 영화를 보면서도, 이게 정말 현실의 고통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졌다.
주인공 부부는 좁은 원룸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전세인지 월세인지 계약 연장이 가능한 부부이고, 여주인공은 기혼 여성이라 취업이 잘 되지는 않지만 짧은 계약직으로라도 일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다른 드라마에서처럼 그 흔한 월세가 밀리고 밥을 굶는 그런 상황은 나타나지 않는다.
남자주인공은 비록 배우 오디션은 떨어졌지만, 다른 일을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모습이다. 취업이 어려운 현실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막바지에 남자주인공은 지하철에서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꾼다. 29세의 신혼부부가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들이 남긴 유서에는 배고프고 춥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얘기를 아내와 주고받는 꿈이었다. 배고프지만 굶지는 않고,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춥지만 그렇다고 몸을 잠시 녹일 집이 없지도 않다. 이들이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충분히 보일러 정도는 잘 작동하는 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형편이 '최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이 사실 그렇다. 먹고 살기 힘들고, 번듯한 내 집 하나 마련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을 정도의 세상은 아닌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취업을 못해도 알바는 구할 수 있고, 그 알바로 당장 오늘의 끼니를 해결하고 이번 달 원룸 월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삶이 힘들고 퍽퍽하게 느껴지는 건 결국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남자주인공은 '우리도 남들처럼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남들처럼 사는 것은 적당히 넓고 따뜻한 아파트에 집을 가진 신혼부부와 비교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출 없이 그런 집을 가질 수 있는 신혼부부는 얼마나 될까?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이 없다면 당장 전문직이어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건 사실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이 정해놓은 '정상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나보다 더 잘난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주인공은 말한다. 배우의 꿈을 포기하는 자신의 남편에게, 내가 언제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냐고. 그녀에게는 그런 삶보다는 남편이 꿈에 도전하고 행복한 모습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말하고 남편이 출근한 후 집에 혼자 남겨진 그녀는 좁은 방 침대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행복의 기준은 주관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도, 결국은 남들과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마주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일러는 또 꺼졌고, 그런 방에서 담요를 두르고 일을 한다.
이 영화에서 보일러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일러는 계속 고장나고, 고쳤는데도 또 고장나고, 또 제대로 고치지 않았는데도 어쩔 때는 잘 작동한다. 밤중에 보일러가 고장나서 살펴보다가 내일 사람을 불러서 고치지 뭐, 라고 반응하기도 한다. 보일러가 고장나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지만 한겨울에 냉수로 샤워를 한다.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도 여주인공은 집에서 일을 한다. 보일러가 작동할 때 여주인공은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 보일러에 인생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다. 보일러가 고장나는 것이 바로 인생의 고난이라고.
인생은 계속해서 고난과 시련이 있다. 그것을 이겨내면 또 새로운 고난이 찾아온다. 때로는 운좋게도 주변의 도움으로, 아니면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그 고난을 바로 마주하고 고칠 때도 있지만 극복을 나중으로 미루고 포기하기도 하며, 타인이 해결해주기를 의존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리 고난이 존재하더라고 결국 우리는 살아간다. 평소보다 힘들 뿐 우리는 어떻게든 해야할 일들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고난이 사라지는 순간들마다 우리는 큰 행복을 느낀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여주인공의 태도이다. 수시로 보일러가 고장나고, 자신의 취업도, 남편의 오디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여주인공은 크게 짜증 한 번 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짜증내고 화도 내고 징징대기도 할만한 상황들인데 그런 것들을 내색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부부가 그나마 덜 힘들고 함께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삶에도 함께여서 괜찮은 여주인공의 태도가 남주인공이 살아갈 힘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 의문은, 이들은 왜 저런 나이에, 저런 형편에 결혼을 했을까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그런 세상이다. 사랑만으로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세상 말이다. 먹고 살 형편이 되어야 독립을 하고, 가정을 꾸릴 형편이 되어야 결혼을 하는 세상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들에게는 아직 숨통이 조금 더 트일 수 있는 세상이었을 거다. 반찬을 보내주는 부모님이 번듯하게 살아계시고, 여주인공의 취업도 훨씬 수월했을 거다. 남주인공도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돈을 더 벌 수 있었을 거다. 꿈을 좇는 게 나쁜 게 아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그 꿈을 잠시만 미뤄둔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결혼도 잠시 미룬다고 큰일나는 거 아니다. 이들에게는 분명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다.
정부나 지역자치단체에서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각종 지원금을 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소득 기준, 혹은 재산 기준이 이 지원금을 주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그 중 또 상당수는 가구원의 소득이나 재산을 포함하기도 하며, 부모님의 재산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부모님의 재산 때문에 거의 모든 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나는 굉장히 불합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돈은 내 돈이 아니고, 독립해서 사는 젊은 사람들은 독립할 만한 소득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 나이가 되도록 부모님 집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내게 돈이 없기 때문이고,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다. 자취방을 구할 돈이 있고 월세를 낼 돈이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오히려 형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걸 정부는 모른 척하는 건지, 그저 외면하는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이 글조차 중산층의 배부른 소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수도권 집값이 10억 이상으로 치솟은 요즘, 차라리 집을 사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그러면 평생 벌어 집을 살 그 10억으로 나는 좀 더 풍족하고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삶이 어렵다는 걸 안다. 전세 물량도 계속 감소하고 있고, 우리 집이 그 어떤 집보다 이사를 많이 다녀봤기에 이사를 계속 다녀야하는 삶이 어떤 건지도 안다. 기회비용으로 집값이 상승함에 따라 얻을 자산의 증가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이 말도 안되는 집값이 떨어질 수 있는 건, 집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집 살 10억에서 매년 5%씩만 이자를 받아도 연간 5,000만원이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세금 떼면 더 줄어들긴 해도 먹고 살기엔 충분하다. 집만 안 사도 된다면, 우리가 꿈꾸는 파이어족이 더 빨리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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