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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리뷰] 파이란

by 미뉴르 2023. 10. 17.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꽤나 평점이 높은 2001년 영화였다.

배경은 2000년. 우리나라가 현재의 모습으로 급변하기 시작하던 초창기의 모습.

영화 초반은 좀 불편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모든 대사가 2~3가지 욕으로만 이루어지며 욕, 욕, 욕...

심지어 나중에 공형진 역의 경수는 '정말', '매우', '많이'라는 말을 모르고 결국 욕으로 표현해버리는 장면까지 나온다.

참... 욕을 많이 쓰는 모습이 무식해보인다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표현의 다양성이 사라진다.

정상적인 말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데 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영화 평점을 보다보면 재밌는 현상이 있는데,

주로 액션이 많거나 남성성이 많이 강조되는 영화에서는 남자들의 평점이 높고

감성적이거나 감동을 주는 영화에서는 여자들의 평점이 높다.

그리고 역시나 욕이 난무하고 조폭건달의 삶을 그린 이 영화는 남자들의 평점이 높았다.

남자들은 그런 욕과 액션에서 재미를 느끼고 '남자'로서의 공감을 느끼는 영화에만 감동을 받는 것일까, 잠시 궁금해졌다.

 

2000년대 초중반의 감성이라면 감동적일 이 영화의 주인공 파이란과 강재(최민식)의 로맨스는, 현재로서 보자면 F보다는 T의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애절하고 안타깝게 그려진 그들의 사랑이, 현실에서 따지자면 만나지 않았기에 예쁠 수 있는 그런 로맨스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미완성의 첫사랑,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지는 수많은 이야기들, 외모만 보고 첫눈에 반했지만 막상 까보면 수많은 단점에 질리고 마는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만나지 않았고 그렇게 상상으로 그려 낸 마음만이 남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사랑. 그게 바로 미완성, 미완결의 아름다움이다. 미완성의 완성은 상상과 기대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너무 잘 아는 현실에 찌든 한 인간으로서, 파이란이 강재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찾아갔을 때, 제발, 제발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현실의 강재가 시궁창 인생을 살고 있고, 파이란의 상상과는 다른 보잘 것 없는 인간이란 걸 알게 되는 순간, 파이란의 삶의 '희망'과 행복, 기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자신의 죽음까지 너무나 가혹한 운명을 맞게 된 그녀에게 그런 거짓 희망이라도 남아있었으면 했다. '희망'이라는 말에 이끌려 인력사무소를 찾았던 그때처럼 말이다.

 

파이란은 똑똑하고 성실한 여자였다.

처음 인력사무소에서 술집?노래방 도우미? 일을 소개시키려 했을 때 빠르게 눈치채고 피를 토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입 안을 깨물 정도로 독하고 강단 있는 여자였다.

강재와의 실제 혼인 여부를 조사하러 나온 조사원에게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거짓으로 둘러댈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힘들다는 내색 한 번 없이, 자신이 머무를 수 있게 된 공간에 '친절합니다'라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강재가 전달해달라고 한 스카프가 남편이 전해달라고 한 것임을, 말도 안 통하는데 빠르게 눈치채고 소중히 간직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 그녀의 삶과, 그녀가 강재를 의지할 존재로 정해버린 모습들이 나에게 많이 각인되었던 것 같다.

현실에서 강재와 그녀가 일찍 만났더라면, 실망과 절망만 남는 그런 로맨스였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든 걸 보면 말이다.

연고 없는 한국에서 '남편'이라는 존재에 그녀가 넣은 그 상상은 무엇일까.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강재는 상상과 다를 것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렇게 상상을 투영해 남편을 그리워해야 그녀의 삶이 의미있는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누군가와 연결되어야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소중한 '누군가'가 남아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강재도 꽤나 특이한 인물이다.

만난 적 없는 '아내'에게 사랑을 주고 죄책감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신기한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조폭 두목 용식도, 강재와 함께 거주하던 경수도, 인력소장도 그의 갑작스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강재가 여리고 감성적인 사람임은 이미 영화 초반에서 나온다.

자신이 어려울 때 잘해주었던 슈퍼 아줌마에게 냉혹하게 대할 수 없는 그의 모습.

사실 불의를 보면 화가 나서 몸부터 움직이는 모습.

용식에게 자신이 이용당함을 알면서도 서로 좋은 결말을 위해 감방에 대신 들어가려 하는 모습.

그런 그가 왜 성실한 삶이 아닌 조폭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용식과의 정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아닌 건 아닌 대로 끊어내는 단호함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다.

마지막에 용식 대신 감방에 들어가는 걸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았냐, 한다면 맞다. 그건 파이란의 죽음으로 강재가 성장하면서 얻게 된 단호함이다.

강재는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성실하고 선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심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용식이 말했던 것처럼 강재는 조폭 사업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를 잘못된 길로 끌어들인 것이 용식이고, 강재는 그걸 알면서도 용식과의 정 때문에 그곳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거다.

언제든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게 너무 늦어버렸고, 뒤늦은 단호함은 그의 죽음을 가져왔다.

그렇게 용식에게 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용식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용식은 강재와는 정 반대되는 인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정, 의리 전부 버릴 수 있는 잔인한 인물이고, 그렇기에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다.

그리고 그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나 두려움보다, 감방에 들어가서 버릴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이다.

용식의 부탁은 이미 부탁이 아니었다.

용식은 강재를 죽이면서 또다른 공범을 만들었고, 결국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갈 인간이다.

 

영화의 연출도 꽤 인상깊었다.

파이란이 들여다보던 거울을 강재가 똑같이 들여다보던 장면도,

강재가 죽어가는 순간에 보는 것이 죽어버린 파이란의 살아있는 유일한 모습이라는 것도.

 

강재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그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나지도 못한 채 서로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들이, 곧 만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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