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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정체성

by 미뉴르 2019. 12. 1.

 

정체성
국내도서
저자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 이재룡역
출판 : 민음사 201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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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체성이라니! 개성 만큼이나 굉장히 개인적인 단어가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내 눈을 사로잡았고 나에게 선택받았다.

 

 절반 정도까지 읽을 때는 이 책의 정체성이 궁금했다.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절반을 넘어가고 나니 핵심 사건이 명백히 드러났다.

 

 동거하고 있는 연인, 그리고 여자의 우편함에 어느 날 들어있는 익명의 편지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여자는 처음엔 당황한다. 그리고 설렌다. 어떤 사람이 쓴 것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물론 남자친구에게 이 사실을 숨긴 채.

 

 그녀는 처음에는 길모퉁이 레스토랑의 단골을 편지의 발신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전혀 관심 없는 그를 보고 그녀의 착각을 깨닫는다. 부끄러워한다. 그 이후에는 집 앞의 나무에서 지내는 거지를 편지의 발신인으로 생각한다. 그의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100프랑을 적선한다. 그런데, 거지의 반응은 당황스러움. 동경도, 애정도 아닌 뜻밖의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그녀의 옷장의 옷이 그녀가 개던 방식과 다른 식으로 개어져있던 것을 생각해낸다. 그녀의 옷장 속 속옷 밑에는 그 동안 받은 편지가 들어있다. 그렇다, 남자친구가 그 편지를 보았다. 어떻게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왜 말하지 않았을까? 그가 발신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 식으로 그녀가 편지를 받고 설레고 착각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남자가 즐기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그가 그녀의 이런 모습을 싫어하게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헤어지기 위해서 싫어할 구실을 이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친구에게서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고 슬프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으로 얼굴을 붉혔다. 이 말과 여자의 태도에 남자는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그녀가 여전히 매력적이며 그녀를 추종하는 남자를 만들어주려고 한다. 그래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편지를 쓰고 우편함에 넣는다. 그가 편지를 쓰면서 기대했던 그녀의 반응은 편지를 받고 나서 그에게 자랑하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우쭐해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녀는 편지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그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 남자는 스스로 만든 가상의 인물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멈출 수 없다. 여지껏 남자가 예쁘다고 해도 하지 않았던 빨간 진주 목걸이를, 편지의 한 마디로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만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마지막 편지를 쓴다.

 '런던'으로 떠날 거라고.

 

 필적 감정을 마치고 온 여자는 편지의 발신인이 남자친구임을 알게 된다. 집에 들어왔는데 그녀의 전남편의 시누이, 그녀가 증오하는 시누이가 조카들을 데리고 와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조카들은 그녀의 방에 들어가 옷장을 헤집어놓았고 편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편지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화를 냈다.

 "이 아파트는 내 것이고 누구에게도 내 장롱을 열어 나의 소지품을 뒤질 권리가 없어. 누구도. 내 말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거야. 그 어떤 사람도."

 이 말은 단순히 조카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친구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누이를 쫓아내고 남자친구와도 싸운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짐을 싼다. 남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그녀는 '런던'으로 간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런던에 왜 가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왜 런던인지는 당신이 잘 알잖아요." 라고 대답한다. 남자는 그녀의 대답에 얼굴을 붉힌다. 그가 만든 가상인물의 마지막 편지에 '런던'으로 떠난다고 썼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그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 편지를 쓴 자가 남자인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남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떠난다.

 남자는 더 이상 자기의 자리가 그녀의 옆이 아님을 안다. 그녀는 그 편지를 받고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에게 화가 나 있다. 그래서 열쇠를 집에 두고 그녀의 집을 떠난다. 어디로 갈 지 망설이다가 혹시나,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런던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올 차비만 남겨두고 런던으로 간다.

 

 그녀는 정말 런던으로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 날, 그 날의 저녁은 집에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런던행 기차가 출발하는 역으로 가는 버스가 온다. 그래서 그녀는 그 버스에 몸을 싣는다. 역에서 우연히 직장 동료들을 만난다. 직장 동료들은 어떻게 그녀가 거기로 올 것인지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를 반갑게 맞아준다. 함께 런던행 열차를 탄다.

 

 남자는 런던행 열차를 탄다. 희박한 확률로, 그녀가 있을 거라는 것에 기대를 걸어본다. 그래서 열차를 여기저기 살피고 돌아다닌다. 그녀는 있었다. 그러나 '학술대회'가 있다던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옆에는 직장동료들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얼핏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내 무시해버린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는 동료들을 버리고 사라진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나서. 남자는 직장동료들에게서 그녀가 또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디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돌아갈 차비뿐인데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그는 부랑자 신세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녀의 꿈, 어쩌면 망상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녀는 갇혀 있다. 도망 가고, 갇혀 있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자신에게 아이가 있었고,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해도 아무도 그녀를 보내주지 않는다. 삶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그녀는 이미 스스로 죽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그가 끌어안는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하기로 약속한다.

 

 

 

 

그녀는 이렇게 어느 날 장-마르크를 잃는다는 상상을 했다. 오직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에 빠지는 것. 그녀는 아마 자살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살은 배신일 것이며 기다림의 거부, 인내의 상실일 것이다. 그녀는 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p. 8 中)

 

 주인공 샹탈이 실종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 생각이다. 사실 이것은 샹탈에게만 해당되는 생각이 아닐 것이다. 실종된 사람을 두고 자살을 한다는 것은 그들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나는 반쯤은 우리 회사의 배반자처럼, 반쯤은 내 자신에 대한 배반자처럼 처신하죠. 이중배반자인 셈이죠. 그릐고 이런 이중배반의 상태를 실패가 아닌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얼마 동안이나 나의 두 얼굴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진이 빠지는 일이거든요. 어느 날엔가 하나의 얼굴밖에는 갖지 못하겠지요. 물론 둘 중에서 나쁜 쪽 얼굴이지요. 심각한 얼굴. 타협적인 얼굴. 그래도 나를 여전히 사랑할 건가요?"

 "당신은 결코 두 얼굴을 잃지 않을 거야"하고 장-마르크가 말했다.

(p. 33~34 中)

 여자의 질문은 나쁜 얼굴만, 나쁜 모습만 남아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였다. 남자는 대답을 회피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그녀는 대답을 듣고 미소를 지었지만 불안했을 것이다. 이 남자의 회피가, 그녀를 떠날 수도 있음을 말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다른 모습, 어쩌면 진짜 그녀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그녀의 정체성이 두려웠을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게 될 그녀의 모습을 그가 사랑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다시 만나서 그가 사랑하던 그녀의 모습을 되찾는 순간까지 일정한 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산속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만나자마자 그녀와 함께 둘만 있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만약 단둘이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그녀를 오랫동안 접했다면 과연 그녀에게서 사랑받는 존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동료나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보여주는 얼굴만 보았다면 그 얼굴도 그를 감격하게 하고 경탄하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그는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p. 41 中)

  위에서 여자가 원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없다. 더 좋게 말해도 확신할 수 없다 정도일 것이다. 그가 사랑한 모습은 그녀의 수줍고,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타협적이고, 위선적인 그녀의 모습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다른 여자를 그녀로 착각했다거나, 그녀가 낯설다는 말이 꽤 여러 번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를 낯설게 느낀다는 것은 그가 알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면 사랑하지 못한다, 그가 알던 모습만 가지고 있다면 다른 여자도 그녀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모습만을 사랑한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반대로 그녀의 낯선 모습을 이미 알고 있지만 여전히 사랑한다, 그가 알던 그녀와 전혀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는다면 사랑할 수 있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책의 결말을 보자면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녀가 아들을 땅에 묻었을 때 아들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훗날 바캉스중에 그녀의 시누이가 물었다.

 "너무 슬퍼하네요. 아이를 하나 더 가져야만 해요. 그렇게 해야지만 잊을 수 있을 거예요." 시누이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기는 생의 기록이 없는 존재. 후임자 속으로 덧없이 지워지는 그늘. 그러나 그녀는 아기를 잊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의 개체성을 옹호했다. 미래에 대항하여 하나의 과거, 불쌍하게 죽은 아이의 소외되고 무시당한 과거를 옹호했다. 일주일 후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우울중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아. 빨리 다른 아기를 가져야만 해. 그러고 나면 잊을 거야." 당신은 잊을 거야: 그는 다른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그 남자를 떠나겠다는 결심이 마음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p. 36 中)

샹탈이 갖고 있는 깊은 아픔이 바로 잃어버린 아이. 모두들 그녀에게 잊어야한다고만 말한다. 그것도 다른 아이를 가짐으로써. 분명 새로운 아기가 생긴다면 그녀는 그 아기를 사랑할 것이다. 그런데 그 아기가 죽은 그 아기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 한 명 한 명은 개별적인 존재이니까. 왜 잊어야만 하지? 왜 그게 의무가 되지? 그녀가 사랑했던 존재를 잊는 것이, 그녀 말고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그 아이를 잊는다는 것이 샹탈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들은 전혀 몰랐다. 계속해서 그녀를 아프게 했다. 적어도 저렇게 말을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다른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라는 말이 나를 분노하게 했고 슬프게 했다. 최소한 그 정도 노력은 필요했다.

 

 

 "내가 그를 비난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더라도 그는 왜 비난하는지 몰랐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때 그는 침묵했어.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정당해야만 했어. 그는 자신의 침묵을 용기라고 생각했어. 심지어 그는 나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박해에 끼여들지 않았고 나에게 누가 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랑까지 했다더군. 그래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고 내가 그를 아무 말 없이 만나지 않자 상처를 받았을 거야. 그에게 중립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내 잘못이었어. 그가 악의에 차고 흉악한 분위기 속에서 어줍잖게 나를 변호하려 들었다면 그 자신도 따돌림, 갈등, 어려움을 겪었을 거야. 내가 어떻게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겠어."

(p. 53~54 中)

 이야기의 큰 맥락과는 관계 없던 부분인지도 모르지만 꽤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던 부분이다. 장-마르크의 친구 F는 장-마르크를 험담화하는 자리에서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말 않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장-마르크는 그 사실에 분노하고 절교했다.

 비슷한 경험이 꽤 여럿 있다. 뒷담은 뒷담을 불러일으킨다는 것과, 결국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함부로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 그렇게 불편한 자리에 있었던 경험 때문에 나는 뒷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에서 그 어린 학생들은 그 자리에 없는 친구를 뒷담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자려고 누워있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밤을 샜다. 다들 내가 그 아이와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잔다고 생각했는지 그 아이에 대한 험담이 오고 갔다. 정말 별 거 아닌 이유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일어나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다음 날 그 아이 옆에 붙어서 친한 척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죄스러웠다.

 반대로 그렇게 나만 없는 자리에서 내가 험담을 당한 적도 있다. 그리고 그 중 나를 옹호한 사람은 없다는 것도, 나를 따돌리는 것에 모두가 동조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책에도 나왔듯, 어줍잖은 변호는 본인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루 아침에 모두가 냉랭하게 돌아서버렸으니까. 잘못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나에게 있다. 잘못은 나를 질투했던 어린 그 주동자에게 있다.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침묵할 수도 있을 텐데요."

 "옆자리에 앉은 저 두사람처럼?" 하고 장-마르크가 웃었다. "아니야. 어떤 사랑도 침묵에 베겨날 순 없어."

(p. 88 中)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결국 내가 살아가기 위해 이 세계는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랑도, 대화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그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에 귀를 대었다. 고른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이 편안한 잠, 너무도 쉽게 그녀가 잠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이렇게 귀를 문에 대고 오랫동안 서 있었고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녀가 가장 약하고 자기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라고. 사실 누가 더 강한가? 두 사람 모두 사랑의 영토 위에 있을 때 강한 사람은 사실 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사랑의 영토가 그들 발 밑에서 사라진다면 강한 자는 그녀이고 약한 자는 그이다.

(p. 131 中)

 그녀는 사실 편히 자지 못했다. 악몽에 의해 수차례 잠에서 깨어나며 잠을 설쳤다. 결국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기는 했지만 그를 사랑하기에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아픔을 억누르고 있게 해주던 장-마르크를 밀어내고 그녀는 아픔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 아닐까.

 맞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약자가 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아플 일이 없기에, 강자가 된다. 아파할 정도로 감정을 내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를 아프게 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상처받고 다 도려내기로 한 상태에서는.

 

 

 "여기서 나갈 수 없나요?"

 "그런데 왜 나와 같이 있으려 하지 않는 거요? 안느"

 "안느?" 그녀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왜 저를 안느라고 부르지요?"

 "그게 당신 이름이 아니었던가?"

 "전 안느가 아니에요!"

 "나는 예전부터 항상 당신을 안느라고 알고 있었소!"

 옆방에서는 여전히 망치질 소리가 몇 차례인가 들려왔다: 그는 마치 망치질하는 데에 끼여들지 말지를 망설이는 듯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잠깐 관심에서 벗어나 혼자 남은 틈을 타서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녀는 알몸인데도 저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벗기려 드는 거다! 그녀의 자아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것! 그녀의 운명으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것이다! 그녀에게 다른 이름을 준 다음 그들은 결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길이 없는 그녀를 익명의 사람들 속에 내던질 것이다.

(p. 172 中)

 마지막 부분의 샹탈의 망상, 또는 꿈 중 일부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정체성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이 정체성이 된 이유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잃고, 그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야했다. 우울증에 빠져있으면 안 되었고, 새로운 아기를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했고, 밝아야 했다. 그것이 바로 '안느'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모습이다. 이미 그녀는 그녀의 진짜 모습과 많이 달라졌지만, 사람들 앞에서 연기는 계속된다. 그것은 장-마르크 앞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자아를, 정체성을 잃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길 강요받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의 운명을 벗어나기를 강요한다. 그녀의 상처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조그만 머리맡 스탠드 불빛을 받고 있는 그들 두 머리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 베개 위에 목덜미를 기댄 장-마르크의 머리: 그 위로 10센티미터 가량 숙이고 있는 샹탈의 머리.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예요. 쉴새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요."

 그리고 말을 멈춘 뒤: "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요.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여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예요."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을 거예요. 매일 밤마다"

(p. 177 中)

 샹탈이 괴롭게 깨어난 이후의 정황은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장-마르크가 어떻게 샹탈을 찾았는지, 샹탈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샹탈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것.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녀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숨김없이 장-마르크에게 보여줄 준비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장-마르크는 그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서로를 사랑한다는 그런 결말이다.

 너무나 심오해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를 못하니 비판하기도 어렵다. 그저 샹탈이 그 아픈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치유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과, 이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 나쁘지 않은 결말인 것 같다.

 

 

17.10.17 본인 작성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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